생각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는 명제이다. 그러나 진화생물학은 생각하는 주체로서 자아의 존재를 허구로 보고, 사고를 뉴런과 신경전달물질에 의해 만들어진 한갓 ‘시나리오’일 따름이라고 본다. 그리고 뇌는 생존을 위한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뇌과학과 진화론에 기초하여 종래에 형이상학에 의존해 온 우리 마음의 존재를 과학화하려는 것에서 윌슨의 통섭 명제는 출발한다. 그러나 윌슨이 말하는 과학화는 근대 계몽주의의 산물이다. 오늘날 근대 계몽주의가 이성을 도구화시켰다는 비난을 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맹목적인 인문학의 과학화는 무의미한 것이다.
이에 이 글은 종래의 ‘마음-의식-생각’이라는 철학적 의미 연관이 생물학적 토대 위에서 어떻게 재해석되는가를 고찰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데카르트의 전제를 비판하는 것에서 출발할 것이지만, 동시에 철학이 생물학적 사실을 어떻게 수용할지에 관해서도 숙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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