巫에서 본 인간과 세계
종교의 정의가 무엇이든지 간에 또 어떤 것을 종교라 칭하던지 간에 그것이 문제는 아니다. 우리가 힘들어 하는 것은 산다는 것 그것 자체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며, 왜 살며, 어떻게 죽는가이다. 더 나아가서는 죽은 자와의 관계와 죽어 갈 사후세계도 우리를 어렵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에 대한 제안이라면, 그것이 추측이든 꾸며낸 가상이던 간에 그것은 구원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자신의 문제로 돌아서게 되면 교리도 예배도 무의미로 환원되고 만다.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은 어떠한가. 지금의 우리 삶을 편리성으로 호도시켜버린 합리적 사유는 초월로써의 사유, 곧 상상력의 우주를 차단하고 전통의 차원을 거절해 버린 것이다. 그러한 차단과 거절은 삶의 고뇌와 인생의 번민까지도 차단할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뜻밖에도 오늘 우리의 현실은 오히려 거칠고 황폐해지고 말았다. 또한 이 시대의 문명은 우리 삶의 터전을 오염과 공해의 숨막히는 공간으로 만들었고, 인간적 가치에 대한 반문조차 상실하고 만 것이다.
인간은 기술의 힘을 확대할 수도 있고, 과학적인 지식으로 자연을 제어할 수도 있으며, 도구적인 영역에서 무한한 발전을 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처음부터 그 궤를 달리 했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과학적 이상이란 것 자체가 인간적 가치의 소멸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과학문명의 출발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자 하는 기치를 내걸었지만, 그러한 이상은 종교적 교의가 지닌 소박한 지식을 뿌리 채 흔들어 버렸고, 인간적 가치에 대한 미련조차 버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과학적인 사고를 삶의 전반에 응용하고 있다면, 우리의 삶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과학적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우리의 삶이 과연 인간다운가’에 대한 반문일 것이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으로까지 자리를 굳힌 과학적 사실들이 과연 과학적으로 정확한가라는 반문과 더불어 신의 존재여부라든가 믿음의 대상을 저울추에 올리는 일들이 과연 과학적인가를 먼저 되짚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