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
원문:
鄭 承頓
1. 문제의 접근 방향
2. 我의 진상
1)윤회하는‘나’와 윤회하지 않는‘나’
2) 범부의 我
3) 覺者의 我
3. 無記의 이면
4. 윤회의 주체
5. 맺음말
1. 문제의 접근 방향
불교를 철학적으로 그 사상의 깊이를 심화해 온 것이 무아설이라고 한다면, 종교적으로 그 실천적 수용의 폭을 넓혀 온 것은 윤회설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전개 과정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무아설과 윤회설이 양립하면서 질과 양의 양면에서 불교를 발전시켜 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는 윤회설이 불교의 본질적인 교의인 것은 아니라고 인정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지적할 수 있겠다. 하나는 윤회설이 불교 이전의 정통 바라문교에서 발아하여,특히 우파니샤드에 이르러 세련되었다는 역사적인 이유이다. 즉 "우파니샤드의 윤회 개 념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단순히 유전과 환경이라는 기계적인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생에서 행한 행동의 집약된 본질과 잠재력의 영향에 의해 개성과 인격이 결정됨올 강조하는 것”이라고 하면서,우파니샤드 사상의 이 요소 역시 불교에 의해 수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불교의 자타카 문헌은 그 수용의 實例로서 지적된다.
다른 하나는 윤회설에서 핵심이 되는 전제가 불교의 중심 교리인 무아설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철학적인 이유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흔히 영혼이라고 표현되는 불멸의 본체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 사이에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개인의 윤회를 가능케 한다고 전제하는 것이 인도 일반의 윤회설인데,불교의 무아설은 그와 같은 불멸의 본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윤회설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윤회설이 불교의 비본질적 교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부당하지는 않다.‘
그러나 본질과 비본질을 차별하는 것만으로는 불교를 지탱해 온 두 기둥일 수 있는 무아설과 윤회설의 의의를 바람직하게 인식할 수 없다. 석가모니는 엄연히 윤회를 전제로 하는 설법을 했고, 윤회설은 그 사실 여부를 떠나서 신자의 삶을 지탱하는 힘으로 기능해 왔다. 솔직히 말해서 무신론자나 유물론자가 아닌 사람이라도 초원자적이고 정신적인 단일한 본체가 끝없이 生死를 거치면서 실제로 영속한 다는 점을 믿기 어려움을 발견하지만, 세계가 기계적으로 운행되지 않음을 믿는 사람들에게 윤회의 교의는 현세의 시련을 헤쳐 나가는 데 힘을 북돋워 왔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사상의 합리성을 따지는 이론적인 시각은 기존의 교설들을 분석하는 반면에 무아설이 불교의 본질임은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자존적 본체를 부정하는 무아설은 불교 철학의 가장 독특한 일면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불교의 모든 교의는 다른 철학 체계와 종교에서도 다소 발견할 수 있으나, 무아설만큼은 명백히 이의 없이 오직 붓다에 의해서 교시되었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 점에 기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