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야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현관 2016. 4. 23.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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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 상당 기간 동안 메를로-퐁티는 후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은 으로 불리는 철학적 작업을 준비했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우리가 읽을수 있는 것은 단지 그 표제로 추측될 수 있는 철학적 단상들을 기록해놓은 그의 작업 노트 뿐이고 체계적 기술에 익숙한 필자에게 그 노트는 수수께끼에 가깝다. 지각의 현상학에서 구체화되었던 현상학적 면모를 통해서 후기 작업의 틈을 메우는 시도가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그가 후에 시도한 존재론적 이행을 고려해볼 때 시간적 갭(현상학과 존재론의 관계)을 해명하지 않고 그의 후기 작업의 공백을 전기 작업의 표현으로 반복하여 메우는 것은 (가능하기는 하나) 논란의 여지가 있을 듯하다그러나 그의 기호철학을 통해서 이 난감한 문제를 살펴본다면 본 글의 운신의 폭은 좀 더 넓어질 수 있을 듯한데, 그는 소쉬르를 재해석하면서 차이를 랑그 안에 가두어 두지 않고 시간적으로 끝없이 지연되는 파를 속으로 개방했기 때문이다. 이는 체계적인 랑그와 달리 파롤의 미완성적이면서 과정적인 기호적 실천을 권하는 것이다.1) 파롤은 언제나 아직 끝나지 않는 것인 한에서 그 때문에 우리는 기호의 진리, 또는 의미의 확정에 대해서 회의적 태도를 견지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그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스트들처럼2) 의미작용이나 기호의 진리에 냉소적인 입장이 되지 않으면서도 이른바 라깡이 강조하고 있는 기호의 미끄러짐을 기호의 본질로 삼았다. 차이로서의 기호나 의미의 애매성 문제는 메를로-퐁티에게 지양되어야할 부정적 측면이 아니라 기호의 진리가 나타날 수 있는 긍정적 토양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방대한 역작, 지각의 현상학의 애매함이 그의 후기 작업 노트의 아포리즘이 드러내는 틈보다 작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상황이 그러하다면 비트겐슈타인의 충고대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함으로써 그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남겨두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표제 하에 말하려 했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없기에 침묵으로 남겨둔다 하더라도, 도대체 왜 메를로-퐁티가 이 문제에 몰두했는지에 대한 관심까지 침묵으로 봉하는 것이 최선일지는 의문이다. 조심스럽지만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만들어놓은 공백에 그의 것이 아닌 것이 확실한 하나의’ ‘다른을 그리는 일, 그 그에 그의 (sign)을 하지 않는 한에서 그의 화두를 공하려는 본 시도가 그의 침묵에 를 끼지 않다. 비트겐슈타인처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해야함을 권했던 키에르어는 가명의 작업으로 침묵하는 진리에 대한 그그리기를 주하지 않았고 역적으로 들있겠으나 그 모실천은 주체화되어야 함을 주장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