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식론리학
史的 佛敎의 一部現象만을 보고 마치 쇼팬하워의 哲學이 佛敎를 그렇게만 받아드리는 傾向이 있었듯이 佛敎哲學을 厭世哲學이라고 誤認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厭世的인 모든 이야기들은 그 內容은 여하간에 모두 소용 없을 뿐만아니라 도리어 해로운 것이니 그런 이야기들은 아에처음부터 연구할 필요도 없고 또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사람은 社會的組織에서 무조건 否定除去해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처음부터 무조건적으로 염세적 이야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은그들이 이렇게 무조건적으로 염세적인 입장에 서지 않는것 만으로도그들자신은 이미 참 가치있는 어떤 學的 立場을 잡기나 한 것처럼 自負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사람들은 따지고 보면 眞理探求보다도 日常生活을앞세우고, 아는것 보다도 먹는것을 앞세우며,義보다도 利를 앞세우는 프라그마티즘의 信奉者들에 불과할 뿐이다. 진리탐구를 위한 學的活動이란 본래 事實의 眞狀을 밝힘호로써 사실을 사실 그대로 알아내는 바로 거기에 그 目的이 있으며 그 밝혀진 결과가 學的欲求 이외의 또 다른 어떤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거나 말거나는 學的 良心에 拘碍될 바가 아니다. 佛陀는 生이 無知(Avidya)에 근거한 것이라 했고, 孔子는 朝聞道夕死可矣라했고,孟子는「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하였음은 眞理는 반드시 生의 欲求충족을 위한 생활수단으로만 있는 것이 아님을 역력히 암시해주고있다. 생활수단으로서의 生의 眞理는 진리의 한 부분 혹은 보다 高次的인 어떤 진리에로의 手段에 불과할 뿐이고,이보다 더 高次的인 그 어떤 眞理는 오히려 生死를 超越한 것이다. 生死를 超越한 眞理는 삶의 奴隸로서의 진리가 아니라 삶을 支配하는 진리로서 때에 따라서는 삶을 버리고 죽음도 선택할 수 있게 하여주는 진리이다. 學問이란 다만 생활수단의 연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종합적이고 궁극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哲學과 宗敎에서는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