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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있는이야기

생명체<유기체론과 부분들의 상호연결성>

생명체<유기체론과 부분들의 상호연결성>
유전 암호 해독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생물학자들은 DNA를 생명체의 구조와 기능을 모두 관장하는 중앙 통제적 물질로 숭배하지 안는다. 생물학자들 중에는 전통적인 유기체론적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이들 중 특히 발생학자들은 사이버네틱스와 기술 시스템의 ‘부분들의 상호연결성’ 개념을 받아들여 발생을 설명하려 했다. 사실 발생학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발생 과정에서 드러나는 생명체의 조화롭고 유기적인 특성의 연구를 학문의 주된 목적으로 삼아왔으나 20세기에 들어 새로운 환원주의적 학문인 유전학에 뒤쳐지고 있었다.
이때 첨단 학문이라는 명성을 가진 사이버네틱스는 발생학자들의 유기체적인 생명관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발생학자들이 사이버네틱스의 ‘중앙 통제’ 개념에는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부분들의 상호연결성’ 개념만을 환영했다. 그들이 보기에 배아의 발생이란 DNA의 중앙 통제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정란 혹은 배아 각 부분의 상호 작용을 통해 진행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기체론적 생물학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는 영국출신의 발생학자 콘라드 워딩턴이 있다.
그는 1930년대 후반부터 2차 대전 기간 동안 물리학자인 블라켓, X선 결정학자인 버날, 생화학자이자 과학사가인 니담, 레이다 엔지니어인 왓슨-왓트 등과 더불어 작전 연구에 참여하였고 적기와 적 잠수함에 대항할 수 있는 화기의 개발에 관여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위너의 사이버네틱스를 알게 되었으며 그것을 사용하여 발생을 설명하려는 계획을 세운 듯 하다. 마침내 그는 1957년에 『유전자의 전략』이라는 책을 출판하였고 “발생의 사이버네틱스”라는 제목을 단 이 책의 2장에는 자신의 유기체론적, 사譴惻綸슬봉?발생이론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여기서 워딩턴은 발생을 피드백에 의해 조절되는 여러 가지 생화학적 반응으로 설명하였다. 그가 보기에 발생 과정은 DNA에 존재하는 유전 정보만을 순순히 따라 진행되는 것이 아니었고 각 세포의 세포질 내에 존재하는 여러 효소들이 다른 세포의 세포질에 영향을 주어 그것들의 분화와 이동을 촉진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이었다. 만약 배아가 정해진 발생의 경로에서 벗어나면 음성 피드백 시스템이 작동하여 기존의 경로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워딩턴이 보기에 이러한 발생 과정은 각 부분들이 서로 잘 조화되어 있고 상호간 영향을 주고받는 유기체적 시스템에 가까웠다.
한편 1961년 네덜란드의 발생학자 크리스티안 레이븐도 사이버네틱스와 정보 이론의 도움을 받아 발생을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사이버네틱스에 관해 RNA 타이 클럽의 회원들과는 매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발생을 관장하는 ‘정보’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으나 그 정보는 핵과 DNA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배아 전체, 특히 세포질 내의 단백질에 다량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배아는 각 부분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리고 핵과 세포질에 골고루 존재하는 정보에 따라 발생하여 성체가 될 수 있었다.
발생학자가 아닌 사람들도 유기체론과 사이버네틱스의 결합에 성공할 수 있었다. 1960년에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수상한 호주의 면역학자 프랭크 맥팔레인 버넷 또한 1959년에 출판한 획득된 면역성의 클론 선택설에서 ‘자기(self)’ 세포와 ‘비자기’ 세포를 구분짓는 ‘정보’는 발생 과정 동안 형성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자기’ 세포와 결합할 수 있는 항체 생산 세포는 발생 과정 중 선택적으로 제거되므로 ‘비자기’ 세포와 결합하는 항체 생산 세포만이 발생 후까지 살아남는 데, 이러한 항체 생산 세포들이 ‘비자기’만을 선택적으로 공격하는 항체를 만들 수 있으므로 ‘자기’와 ‘비자기’를 구분하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자기와 비자기에 관한 정보가 DNA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 과정을 동안 일어난 세포들의 선택 과정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그의 주장은 게모우 등의 DNA 중심적 정보 이론과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1940년대 초에 미국의 유기체론적 생태학자 클레멘츠의 ‘천이’ 개념과 ‘극상’ 개념을 받아들여 ‘면역 관용’ 이론을 만들었던 버넷이 1950년대 말에 사이버네틱스의 정보 이론을 수용한 것은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1963년에 프랑스 파스퇴르 연구소의 쟈콥과 모노가 제안한 ‘유전자 조절’ 개념도 유기체론과 사이버네틱스의 결합으로 탄생했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그들이 생각한 유전자에는 단백질을 만드는 ‘구조 유전자’ 외에도 ‘조절 유전자’가 있었으며 이 조절 유전자가 만든 단백질은 락토오스와 같은 특정 환경 물질의 유무에 따라 형태적 변화를 일으켜 구조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할 수 있었다. 즉, 조절 유전자가 만든 억제자 단백질은 구조 유전자가 있는 DNA에 결합하여 그것이 단백질을 만드는 것을 막으나 억제자가 락토오스와 결합한 뒤 서 떨어지면 구조 유전자는 다시 단백질을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를 때 유전자는 세포의 활동을 중앙에서 통제하는 기능을 가지지 못했고 세포질 내의 여러 단백질과 환경 물질의 영향을 받아 피드백 시스템처럼 작동할 뿐이었다.
쟈콥과 모노가 이러한 유전자 조절 방법을 “여러 지점에서 화학적 활동을 조절하는 사이버네틱 시스템”이라고 불렀으며 생명체의 발생도 유사한 방식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유기체론의 전통적인 문제인 발생 과정을 자신들이 생각한 사이버네틱 시스템으로 해명하려 한 것이다. 그들은 각 세포들이 주위 세포들의 영향을 받아 자신이 가진 유전자 중 특정 유전자는 발현시키고 다른 유전자는 억제하는 과정으로 발생을 설명했다. 이러한 식으로 발생이 계속 진행되면 각 세포가 발현하는 유전자의 종류는 서로 매우 달라질 수 있었고 이에 따라 각 세포들의 구조와 기능도 분화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