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근원적 시간과 유식불교의 아뢰야식이 마음의 사태로서 우주의 자궁을 이룬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하지만, 인과 연들로 연기하는 아뢰야식과는 달리 이 시간이 모든 변양태들의 근원답게 혼자서 저절로 자기 자신을 시간화한다는 점에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 것이 바로 지금의 논문이다. 아뢰야식 연기설에 의하면, 이 식은 인연, 소연연, 증상연, 등무간연 등 네 가지 원인들에 의지해서나 능변작용과 요별작용을 수행할 수 있다.
우선 아뢰야식은 종자뢰야의 인능변작용에서 생겨난 현행뢰야답게 종자를 인연으로 삼아서 현행한다면, 근원적 시간은 모든 변양태들의 퇴화한 힘을 압도하는 가장 강력한 힘답게, 또한 그것들을 미리 가능하게 하는 선천적인 조건답게 아무런 인연 없이 혼자서 저절로 생기한다. 한편 아뢰야식은 과능변작용에서 종자 등과 같은 상분과 이 상분을 요별하는 견분으로 변현된다. 이 경우 이 식의 상분은 이 식의 요별작용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 소연연을 이룬다. 그러나 존재자는 가장 선천적인 개방성의 사건답게 가장 먼저 생기하는 근원적 시간의 열린 공간을 떠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시간의 소연연이 될 수가 없다. 또한 어떤 식의 작용에 도움이 되거나 힘을 보태주는 것이 바로 그 식의 증상연을 이룬다. 식의 작용에 증상연이 되려면, 결정, 유경, 위주, 취자소연의 네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아뢰야식과 말나식은 그 조건들을 각각 서로 만족시키기 때문에 서로를 증상연으로 삼는다. 그러나 근원적 시간은 모든 변양태들 너머에서 가장 강력한 힘 자체로 군림하기 때문에 어떠한 증상연도 필요가 없다. 특히 현존재는 그 네 가지 조건들 중 결정과 유경의 조건을 만족시키지만, 이 시간으로 피투되어 있는 한에서 위주와 취자소연의 조건을 구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시간의 증상연이 될 수가 없다. 그럭저럭 아뢰야식의 연기설에 계합하는 것은 이 시간의 각시성 밖에 없다. 전 찰나의 아뢰야식이 멸할 때 다음 찰나 같은 부류의 식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이미 소멸한 전 찰나의 아뢰야식은 다음 찰나의 이 식의 등무간연을 이룬다. 언제나 인과 연들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 식은 등무간연을 따라서 매 찰나마다 전멸후생의 방식으로 상속한다. 근원적 시간은 인연 등 어떠한 원인들에도 의지하지 않고 가장 강력한 힘답게 저절로 생기하지만, 힘의 원천인 한에서 한 순간의 생기를 마치고 다음 순간 다시 거듭 생기하는데, 이를 두고 이 시간의 각시성이라고 한다. 이 시간이 각시성의 방식으로 그때마다 거듭 생기한다는 점에서 아뢰야식의 등무간연에 잘 계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근원적 시간은 아뢰야식과는 달리 종자와 같은 인연도 따로 없고 존재자를 소연연으로 삼지도 않으며 현존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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