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무상(諸行無常 sabbe saṃkhārā aniccā)
일체개고(一切皆苦 sabbe saṃkhārā dukkhā)
제법무아(諸法無我 sabbe dhammā anattā)
이것은 붓다의 궁극적 가르침, 이른바 三法印이다. 법인이란 ‘dharmamudrā’, 즉 가르침의 표시・인증・도장이란 의미이다. 세상의 공문은 인장이 찍혀야 비로소 정식으로 효과를 갖는다. 또한 도장은 찍는 바로 그 순간, 먼저 찍히고 나중에 찍히는 것 없이 한 순간에 동일한 모양으로 찍혀 나오기 마련이다. 그와 같이 우주의 시작과 끝이 동시에 한 곳에 담겨 있는 것, 그것이 법인의 의미이어서, 법인은 상징성이 매우 강한 단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삼법인은 인간과 세계, 우주의 시작과 끝, 일체의 모든 것이 한 데 담겨 있는 ‘세 가지 바른 가르침의 인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세계,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그 가운데 존재하는 일체의 모든 것은 무상하여 생성되었다가 결국은 소멸해 간다(諸行無常). 그러한 무상성은 인간에게 괴로움을 불러온다(一切皆苦). 그러한 괴로움이 야기되는 것은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諸法無我). 존재하지 않는 ‘나’, 혹은 내가 아닌 것에 대해 ‘나’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은 생겨난다고 붓다는 말한다. 그러나 ‘無我’라면, 다시 말해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인식하는 ‘나’, 현실 속에서 이러저러한 일들을 경험하는 구체적인 ‘나’는 무엇인가라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혹자는 말한다. 그것은 假我일 뿐이라고. 혹자는 또 말한다.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러한 진리의 세계에 眞我가 있다고.불교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가아・진아와 같은 낯선 개념들은 무척 혼란스럽게 다가온다. 자아란 세속제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존재하는 것이지만, 승의제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2중 진리설’ 등과 접하면 그 혼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럴 때면 ‘붓다의 無我說法, 그 자체는 도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일까’라는 물음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또 그러한 설법내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나는 것은 아마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그 구체적인 설법내용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설법 당시의 정황들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붓다의 말씀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 그것의 핵심이 ‘無我說’이라고 할 때, ‘무아’라는 기본적 전제아래 붓다는 과연 인간들의 행위와 그것들에 대한 과보, 나아가 인간들의 윤회하는 삶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의문들은 붓다 생존 당시부터 이미 존재했던 듯하다. 초기경전에서도 ‘행위의 주체는 누구인가, 윤회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제자들의 질문 이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아와 윤회’에 관한 문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많은 논쟁을 야기하고 있다. 최근 우리 학계에서 ‘무아와 윤회의 양립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제기되었던 것 역시 그러한 사례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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