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결코 단일한 체계가 아니며, 시대와 지역에 따라 전개된 온갖 상이한 학적체계가 모여 이루어진 매우 복합적이고도 유기적인 체계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타의 말씀(교법)이 그의 자내증(自內證)을 근거로 한 가설적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말씀이 바로 그의 깨달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깨달았던 것인가? 2500년에 걸친 불교사상사는 바로 무엇을,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에 대한 탐구와 해석의 도정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이른바 ‘소승’으로 일컬어지는 아비달마에서였다.
불타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된 불교(학)는 결국 인간이성의 역사와 함께 하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대립하기도 하였고 종합하기도 하였으며, 지양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중의 어떤 것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만 남겨지기도 하였고, 어떤 것은 이제 세월에 씻겨 형해만이 남았음에도 여전히 우리의 관념을 지배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소승이다. 소승 성문에 의해 작성된 아비달마는 불교학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경전을 결집하였고, 그것을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대승’을 자처한 보살승들은 그 같은 해석을 부정하였을 뿐더러 소승의 경전자체를 인정하지 않고서 새로운 경전을 결집하였다. 그것은 길고 긴 대립과 항쟁의 예고였다. 그로부터 2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 여전히 우리의 불교사상사나 불교학개론서에서는 이 불교에 대해서는 언제나 침묵하든지 혹은 ‘실유론의 입장에서 오로지 자리(自利)만을 주장하는, 불타정법을 왜곡한 이기적인 불교’, 그리하여 ‘마땅히 버려야 할 불교’로 매도하고 있다. 그들이 왜 그러한 주장을 하게 되었던가에 대한 교학적 반성도 없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다만 원시불교의 연장일 뿐이라고 인식한 까닭에서인가, 혹은 타기해야 할 ‘소승’이기 때문인가? 불교는 결코 ‘구호(口號)’의 이념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왜 무상의 찰나멸을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실유를 설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인가? 혹 제법의 실유를 소박한 실재론쯤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그들은 무상의 이치도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닌가? 또한 그들은 왜 한편으로는 3아승지겁에 걸친 보살의 이타행을 설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성문의 열반을 설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인가? 혹 그들이 추구한 열반 자체를 이기주의(egotism)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유부 아비달마에 있어 열반이란 제법분별의 예지에 의해 ‘자기’ 혹은 ‘자아’가 해체된 상태로서, 바로 무아의 증득과 더불어 획득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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