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사에서 흔히 실존철학은 19세기 후반의 사상가들이었던 니이체와 키에르케고르에서 시작해서 20세기에 들어와 야스퍼스,하이데거,마르셀, 사르트르,카뮈 등에 의해서 전개된 철학사조로 규정되고 있다. 실존철학의 비조로 불리는 니체나 키에르케고르가 실존철학이란 용어를 알지 못했고 하이데거나 마르셀 그리고 카뮈와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철학을 실존철학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했음에도,실존철학자들로 분류된 철학자들에게 일정한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철학자들은 서로 간의 본질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인간의 존재방식을 눈앞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존재방식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것으로 보면서 인간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통해서 인간의 본질을 파악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종래의 철학에 반발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 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그러한 객관적인 관찰을 통해서는 인간이란 존재의 진면모는 파악될 수 없으며,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인간의 진면모를 다 파악한다고 주장할 경우에는 사실은 인간의 진면모를 왜곡하고 만다는 자각에 입각해 있다. 하이데거가 은닉의 차원을 강조하고 야스퍼스가 초월의 차원을, 그리고 사르트르가 의식의 본질을 무,라고 규정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가 그 모든 대상화하는 이론적인 파악을 넘어서는 차원을 갖는다는 사실을 가리키기 위해서라고 생각된다. 이런 맥락에서 실존철학자들은 인간의 존재를 여타의 존재자들의 존재와 구별하여 '실존’이라고 부른다.
물론 실존철학 역시 철학이고 철학이란 시나 종교와 달리 개념적인 파악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이들 역시 인간존재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 자체를 부정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 존재를 개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단 인간의 존재 자체가 자신을 드러내 보여야 할 것이다. 실존철학은 인간의 존재 자체는 단순히 눈앞의 사물을 파악하듯이 인간을 관찰하는 것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후설에 이르는 근대의 의식철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의식구조에 대한 내적인 반성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존철학자들 역시 그러한 관찰과 내적인 반성을 통해서 인간의 일정한 면모가 드러난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인간의 진면모는 그러한 접근방식을 통해서는 드러나지 않으며 오히려 은폐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존철학자들은 인간의 존재 자체는 외적인 관찰이든 내적인 반성이든 단순히 관찰하는 방식을 통해서는 드러나지 않으며 실존적인 수행을 통해서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인간의 진면모는 니체에서는 영원회귀 사상,즉 우리를 분쇄할 수도 있는 가장 무거운 사상을 인수하는 것을 통해서,키에르케고르에서는 신앙이란 실존적인 비약과 함께 신 앞에서 단독자로 서는 것을 통해서,하이데거에서는 불안 이란 기분을 인수하면서 죽음에로 선구하는 것을 통해서,야스퍼스에서는 한계상황에 과감하게 직면하여 철저하게 좌절하고 이와 함께 초월의 차원에로 비약하는 것을 통해서,그리고 사르트르와 카뮈에서는 구토와 부조리의 기분에서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낯설고 섬뜩한 무의미한 존재에 마주하는 것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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