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존재자만 있을 뿐 비존재자는 있을 수도 없으며, 생각되어 질 수도 없다."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참다운 지식이란 이성적 인식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이성적 인식이 가르키는 것은 존재만이 있는 것이며, 비존재 내지 무(無)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파르메니데스는 공간속에 존재자가 충만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텅빈 공간에 대한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텅빈 공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운동을 배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체의 움직임은 완전히 비어 있는 특정한 공간 안에서 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무로 이루어진 어떤 공간안에서 물체의 이동을 우리는 운동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물체의 활동으로서 운동이란 텅비어 있는 공간을 인정하여야만 되는 것이다. 즉 무의 인정은 운동의 인정과 동일한 것이다. 반대로 운동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또한 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이는 곧 생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무나 운동이 있을 수 없으므로 생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이렇게 생성이나 운동 그 자체를 부정하였던 파르메니데스는 사상적인 배경은 그의 스승 크세노파네스에 두고 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 제논과 멜리쏘스에 의해서 그의 이론은 아주 잘 방어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철학사상을 우리는 엘레아학파라고 칭하고 그들의 근본 사상을 "단일성"으로 표시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이러한 그들의 사상을 '전체임과 동시에 하나'라고 설명하고 있다. 크세노파네스에 있어서 이러한 '전체임과 동시에 하나'는 신성(神聖)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곧 처음도 끝도 없이 그 자체로 항상 같은 것이며, 불변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 '하나'가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분리시키는 것도 아니며, 인간이 생각하는 전지전능한 신도 아니다. 비록 신이 "모든 것을 보고 사유하고 들을 수" 있지만, 운동이 없는 상태이기에 신 역시 동일한 장소에 머물러 있어야 되며, "결코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신이 볼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생기고, 보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고의 영역 역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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